[조선의 역사] 신미양요의 배경과 원인 및 조선의 변화

186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서양 열강의 조선 침략 사례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 선교사의 처형을 계기로 시작된 이 전쟁은 당시 조선의 대외 정책과 서양 세계의 침략적 확장주의가 충돌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이 서양 세력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부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역사] 신미양요의 배경과 원인 및 조선의 변화

신미양요의 배경과 원인

신미양요는 1871년 조선과 미국 간에 발생한 군사적 충돌로, 조선의 쇄국정책과 미국의 개국 요구가 충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과 미국의 상황, 그리고 양국 간의 상호작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9세기 중반,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도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양 세력의 침입을 철저히 막고자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은 서양과의 통상 및 외교 관계를 거부하며, 외세의 침략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한편, 미국은 19세기 중반부터 아시아 지역에서의 상업적 이익을 확대하고자 했다. 미국은 중국과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과도 통상 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미국의 이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미국 상선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도착했으나 조선 당국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조선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미국은 조선과의 통상 관계를 재차 시도하기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1871년, 미국 아시아 함대는 로저스 제독의 지휘 아래 강화도로 향했다. 미국은 조선에 통상 개국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무력 사용을 경고했다. 그러나 조선은 미국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며, 무력 대응을 준비했다.미국 함대는 1871년 6월 10일 강화도에 상륙하여 덕진진과 초지진을 점령했다. 조선군은 병인양요 때 겪은 서양의 압도적인 화력을 상대하기 위해 내륙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펼쳤다. 조선군은 미군의 좌측방의 산악지대를 활용해 게릴라 공격을 시도했으나, 짧은 조총의 사거리로 인해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후 미군은 광성보를 공격하여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의 지휘 아래 결사항전했으나, 결국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패배했다.신미양요는 조선의 쇄국정책을 유지하려는 노력과 미국의 개국 요구가 충돌한 사건으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이 서구 열강의 개국 압력에 장기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주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척화비를 세우고 서원 철폐를 단행하는 등 내부 결속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부에서는 통상 거부 정책의 한계성을 재인식하는 목소리가 커졌다.결국 신미양요는 조선이 외세의 침략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는 이후 조선이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미양요는 조선의 쇄국정책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조선이 국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개방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미양요의 전개와 주요 사건

신미양요의 전개와 주요 사건은 1871년 6월 초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은 조선 정부에 통상 개국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군함을 보냈다.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무력 대응 태세에 돌입했다.6월 1일, 미 함대 일부가 강화도 인근 손돌목에 도착하자 조선군은 대포로 포격했고, 미군도 응사하며 일시 퇴각했다. 이후 미군은 강화도 덕진진과 초지진을 공격해 점령했다. 조선군은 내륙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6월 10일, 미군은 광성보를 공격해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어재연 장군이 지휘한 조선군은 결사항전했으나 미군의 화력에 밀려 패배했다.전투 중 미군은 조선의 군기와 문서 등을 노획했는데, 그중 어재연 장군의 기(旗)도 있었다. 이 기는 2007년 한국에 반환되어 강화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전투 이후 조선 조정은 접촉 창구를 부평부사 이기조로 바꿨다. 이기조는 강경한 어조로 결사 항전 의지를 밝혔다.한편 전투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대원군은 소문 확산을 경계해 사대문 밖 이탈을 금지했다. 조선인 중에는 패전 공포로 100명 이상이 자살했다고 한다. 결국 미군은 더 이상 협상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로를 석방한 뒤 철수했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미국의 개국 요구를 물리적으로 격퇴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쇄국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서구 열강의 개국 압력에 장기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조선 정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려 했으나, 개화파 등 개방론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조선의 역사] 신미양요의 배경과 원인 및 조선의 변화

신미양요 이후의 영향과 조선의 변화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의 개국 압력에 장기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음을 절감했다. 비록 이번에는 미국의 개국 요구를 물리치고 쇄국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더 큰 위협에 직면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이에 조선 정부는 대원군의 지휘 아래 내부 결속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척화비를 세워 서양 문물을 배척하고, 서원을 철폐하여 사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등 전통적인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화파를 중심으로 개방과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갔다.신미양요 이후 조선 사회에는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생활 모습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통 한복 대신 양복을 입는 이들이 생겨났고, 전등, 전화, 우편, 전차 등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도입되었다. 극장, 다방, 카페 등 새로운 문화 시설도 등장했다.경제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났다. 개항장 객주들은 중개업, 창고업, 여관업, 금융업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지주와 상업자본가들 또한 상회사를 세워 외국 상인들과 경쟁했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열강의 경제적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광산, 삼림, 철도, 해운, 어업 등 주요 이권이 외국 세력에 넘어가게 되었다.이처럼 개항 이후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경제 주체들이 등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외세의 경제적 침탈도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민족자본가들은 은행과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하고자 노력했다.한편 개화파를 중심으로 근대화와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을 계기로 개화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인해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후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적 국가 체제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인해 국민의 반발에 부딪혔다.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농민군은 외국군 철수, 탐관오리 처벌, 신분 차별 철폐 등 개혁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전주화약을 체결하며 개혁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발발로 개혁은 중단되었고, 일본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은 더욱 요원해졌다.결국 신미양요 이후 조선에서는 개화와 부국강병을 향한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청과 일본 등 외세의 내정 간섭과 경제적 침탈로 인해 근대화는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도 일본의 강압으로 자주적 근대화는 좌절되었고, 결국 국권을 상실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미국의 개국 요구를 물리적으로 격퇴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쇄국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서구 열강의 개국 압력에 장기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조선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며 근대화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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